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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일대기

행복교육의 숲 함께 걷는 배움길, 충청북도단재교육연수원이 함께합니다.

단재 신채호 사진
당시 단재선생의 부모는 논마지기는 고사하고 밭조차 버젓한 것이 없었으니, 산간밭을 개간하여 보리와 콩, 옥수수 농사를 지어 허기를 메우는 지경이었다. 그것도 보릿고개에는 남아있는 식량이 거의 없어 산나물을 캐어 죽을 쑤어먹어야 했다.

단재의 할머니 외가가 있는 도리미 마을은 부근의 두 부락과 함께 어남리를 이루고 있는데, 계족산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사이의 삼태기 같은 깊은 골짜기에 군데군데 집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봉소골이라고도 불리웠는데 이것은 새둥지 같은 깊은 산 속에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외딴 곳에 떨어진 마을의 전체 형편은 모두 비슷하였다. 가난한 살림속에 성장한 터라 단재는 몸이 매우 허약하였으며, 병약하여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할머니의 외가가 있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난 단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단재에게 가장 커다란 고통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신광식을 잃는 슬픔이었다.

항상 자신과 자신의 형 재호에게 큰 힘이 되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단재에게 큰 불행이었다. 신광식은 고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추정리 가래울 대왕상 후미진 곳에 묻혔다. 그리고 남은 식구들도 일가 친척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는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돌아왔다.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 신성우는 마을에서 서당을 열고 글을 가르치며 한편으로는 두 손주에게 본격적으로 한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단재선생의 재능은 이때부터 발휘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홉 살에 중국역사인 '통감'을 통달하였고, 이후 삼국지와 수호지 등을 거침없이 읽어나갔다.

단재선생은 열살무렵 한시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써레와 쟁기를 지고 나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었다.

< 朝出負而氏 論去地多起 >
'이른 아침에 써레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세, 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
연날리기를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었다.
< 高低風强弱 遠近絲長短 >
'높게 혹은 낮게 날림은 바람의 세고 약함에 있고 멀리 혹은 가까이 날림은 실의 길고 짧음에 있구나'
이렇게 점차 학문의 정도가 성숙하게 되어가던 즈음에 단재선생에게는 또하나의 슬픔이 닥쳐왔다. 항상 아버지처럼 단재선생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던 형 재호가 단재의 나이 13세때 세상을 뜬 것이다.

16세가 되던 해에 단재는 주위의 권유에 의하여 풍양조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혼인을 한다. 17세에는 진사를 지낸 신승구의 집에서, 19세에는 목천의 신기선의 사저를 드나들면서 한학을 익힌 단재는 드디어 신기선의 추천으로 19세에 성균관에 입교하게 된다.

성균관에 입교한 단재는 이종원, 이남규 아래에서 수학을 하며 훗날 이름을 날리는 변영만, 김연성, 유인식, 조용은 등과 교유하게 된다.

단재선생의 친필(한문) - 신채호가 1901년 2월 7일에 쓴 편지. 수신인은 미상이며, 집안 대고모의 팔순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다 < 단재선생의 친필 >

단재는 독립협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절정을 이루던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당시 단재는 내무부 문서부 소속으로 일하였는데. 이 부서에는 이상재, 신흥우, 김규식 등이 함께 있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힘차게 진행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심해져 결국에는 여러사람들과 함께 단재도 검거되어 투옥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신기선의 후원으로 석방은 되었지만 처음 경험한 독립협회의 운동은 단재에게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공부하게끔 하지 않았다. 1901년 단재는 고향 근처 인차리에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문동학교를 세워 젊은 청년들을 교육하여 나갔다.

1904년 고향에 있던 단재는 이하영 등이 황무지개간권을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균관으로 다시 올라와 항일성토문을 작성하고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항일성토궐기를 한다. 1905년에는 성균관 합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를 받았지만, 곧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황성신문'의 발행에 참여하던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황성신문에서의 단재 필치는 예리하고 강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한데 모았고, 이후 언론인으로서의 단재활동을 가늠케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을 비난하는 장지연의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인쇄되고 난 뒤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단재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초빙한 사람은 그 신문의 총무를 맡고 있던 양기탁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도 단재의 글들은 사회의 중요한 이야기 거리였다. 그 옛날 나라를 구했던 영웅들을 다시 살려내 현재의 나라를 구하려 하였던 단재는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 모두는 서두에서부터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건져보려는 단재의 소망이 한껏 들어간 명문들이었다. 역사가로서, 학문가로서 다방면에 걸친 단재의 재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 '천의당시화', '소설가의 추세' 등을 발표하여 여러분야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단재는 1910년 1월 6일자 신문에 '한일합방론자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하여 국내에서의 활동을 접고 안창호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안창호에게 보낸편지 <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
1910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의 점점 심해지는 책동에 대하여 대응책을 논의하는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신민회는 어려워진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을 접고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구체적 사업으로는 서북간도를 비롯한 시베리아, 미주 등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나아가 이들 지역에 동포들을 이주시켜 항일의 근거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1910년 4월 8일 단재는 일단 국내를 빠져나가 중국 청도에서 만나자는 계획에 따라 안정복의 '동사강목'만을 들고 김지간과 국경을 넘어 신민회 회의가 열리는 청도로 갔다.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할 중대한 회의였던 청도회의는 독립운동에 대한 점진론과 급진론이 대두된 회의였고, 따라서 여러대안이 치열하게 맞선 회의였다.

일주일동안 진행된 청도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길림성 밀산현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모든 독립운동의 기지를 이 곳에 두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종호의 출자금과 여러 각처의 성금을 통하여 농토를 마련하고, 무관학교도 세우려던 이들의 노력은 이종호의 포기로 결국 실패하고 망명인사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단재도 러시아 블리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이 곳 블라디보스톡에서 단재는 '해조신문', '청구신문', '권업신문', '대양보' 등의 발행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단재의 몸을 돌보지 않는 활발한 활동은 단재의 회약을 가져왔고, 이러한 단재를 보다 못해 상해의 신규식이 단재를 불러들였다. 대충 몸의 기력을 회복한 단재는 신규식이 운영하던 동제사에서 잠시 머물면서, 신규식의 도움으로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박달학원은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 길을 찾아보려는 단재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한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원의 강사로는 문일평, 홍명희, 조소앙, 신규식 등이 초빙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1914년 단재는 중국 망명 중 역사의식의 대전환을 맞는 기회를 갖게 된다. 윤세용, 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그들이 창설한 동창학교(東昌學校) 운영에 참여하기 위하여 환인현으로 갔던 것인데, 윤세복, 신백우, 김사, 이길룡 등과 함께 백두산을 거쳐 만주를 돌아가는 대 여행을 가졌던 것이다.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 등의 여행은 이후 단재에게 대고규려적인 사고를 갖게하는 귀중한 경험을 준다. 단재가 구상하던 고대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고 구체화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선생과 함께 찍은사진 < 신석우ㆍ신규식선생과 함께 >

이후 단재는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유동열, 조성환, 성낙형, 이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이 조직의 활동이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역사연구와 문학적인 창작에 몰두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1916년 봄에 단재는 북경에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탈고하는데, 이 작품은 단재가 한놈의 입과 손을 빌어 나라의 독립운동전개를 상징적 수법으로 극화한 대표적 소설이다.

단재는 이 기간도안 대종교(大淙敎)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데, 대종교의 제1대 교주 나철이 구월산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긴글을 남기고 자결하자 그 비통한 심사를 《도제사언문》(悼第四言文)을 지어 바치며 달랬다. 그 후 단재는 제2대 교주 김교헌과도 함께 대종교 교육에 참여하였으며, 이 일에는 유근, 박은식 등이 함께 하였다. 후일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대종교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

아끼던 제자 김기수의 죽음과 조카 향란의 혼인 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돌아온 단재는 그후 북경의 보타암에 기거하며 역사연구에 매진하였다. 이때 벽초 홍명희는 남양군도에서 삼년간 방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였는데, 단재의 숙소를 자주들르며 평생동안의 남다른 우정을 나누게 된다. 한편, 임시정부의 수립에도 적극 참여하였던 단재는 대통령으로 이승만의 추대되자 위임통치를 미국에 건의한 경력을 들어 이메 반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뜻과는 반대로 일이 성사되자 단재는 임정을 나와 임정을 비판하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한다. 또한, 임정이 발행하던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하고 임정의 잘못된 노선을 비판하는 소위 '신대한사건'을 주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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